Interview (2012)

‘투덜거림’에서 ‘모색’으로

*전시 거기 그렇게 있는 to be there as they are

이대범(이하 ‘이’): 2009년 대학 졸업 이후 예멘 공화국(Republic of Yemen)에 2년 정도 거주했다. 그곳에서의 생활, 그리고 지금은 어떻게 지내는지?

장용성(이하 ‘장’): 이라크 파병을 갔었다. 그 때 중동 지역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예멘에선 2년 동안 카페에서 일하고, 아랍어를 공부했다. 이제 돌아온 지 1년 조금 넘었다. 생활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작년 6월에 결혼을 했고 아이도 낳았다. 졸업 이후 시간은 정말 정신 없이 지나갔다. 빠른 속도와 다양한 변화에 적응하려 하면서 내 자신이 지금까지 유지하던 습속들이 그것들과 충돌하기 시작했다. 당연하고 익숙하던 것을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럼에도 계속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 괴리와 갈등의 연속이었다.

이: 졸업의 문에 도달하는 것은 숨이 벅찬 일이다. 생각하고 되돌아 볼 여지를 가질 시간이 없기 마련이다. 무엇을 하는지, 왜 하는지, 그것이 맞는지, 틀린 지 생각할 겨를 없이 달려야 했을 것이다. 자의건 타의건 어쨌든 작업을 한동안 하지 못했다. 그 시간이 오히려 무작정 달리던 자신의 작업에 대해 거리 두기를 하고 바라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을 듯 하다. 졸업 이후 ‘충돌’을 경험하고 나서 졸업 당시의 작업을 보면 어떤가?

장: 작업 속도가 느리다. 그래서 매주 교수님을 만족시키는 결과물을 내지 못했다. 졸업 이후엔 당시 그림을 볼 겨를이 없었다. 그러다가 예멘에서 돌아온 후 작업을 다시 봤다. 작품 자체보다도, 미술, 작품, 작가에 대한 막연한 생각들을 정리하는 계기가 되었다. 피상적으로 알고 있던 ‘미술’에 대한 신비감, 그리고 이에 대한 환상이 있었다. 이를 지우는 계기가 되었다.

이: 졸업 이후 많은 사람이 이 때문에 힘들어 한다. 자신이 알(았)던 모든 것이 사실과 다르고 현실과 거리가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작가가 느낀 ‘신비감’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장: 예멘에는 예술에 대한 의식이 미비함에도 불구하고, 사회가 어떻게든 돌아간다. 어쩌면 그동안 내가 ‘전부’라고 여기던 예술 그 자체는 실제 삶에서 차지하는 역할이 미비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삶과 예술에서 후자에 무게를 두었는데, 그것이 허상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지금은 다소 삶과 예술이 동등한 층위에 놓여 있다. 즉 예술을 대하는 나의 무게감이 가벼워졌다. 이제는 집에서 설거지 하는 것과 그림 한 장 그리는 것이 비슷하게 다가온다.

이: 지금은 균형을 잡고 있다는 말은 이전에는 예술에 상당한 무게를 부여했다는 뜻인데.

장: 막연하게 미술이 뭔가 있어 보였다. ‘고급’적인 것으로 내가 그것을 향유하고, 그곳에 들어간다는 것이 대단해 보였다.

이: 졸업 이후 가장 먼저 사회적 시스템에 편입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피부로 느끼게 된다. 다음으로 자신이 알던 미술계와 또 다른 미술계가 곳곳에 있다는 사실을 자각한다. 여기서 좌절을 느끼는 사람이 상당하다. 다른 모색을 하기보다는 회의와 절망의 목소리가 더 크다.

장: 동기들도 같은 고민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작업과 삶을 동시에 지탱해야 하다보니 그 어디에도 방점을 두기 힘들다. 그런 시간이 길어지면서 더 조급해진다.

이: 졸업하고 가장 필요한 것은 일정 기간 동안 ‘돌아보기’의 과정이다. 그런데 거리 두기를 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다. 졸업 이후의 조급증으로 인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함에 대한 괴로움은 있을 수 있지만, 돌아보며 다시 다지는 작업이 생략됐다. 자신의 작업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고민이 상투적으로 느껴지겠지만 꼭 필요한 것이다.

장: 가정이 생기니 불필요한 지출을 막아야 했다. 작업실이 없었다. 그 사실이 힘들었다. 첫 개인전을 준비하면서도 ‘신세한탄’을 했다. 나를 둘러싼 사회체계뿐만 아니라 나 자신의 문제에 대해서도 한탄을 늘어 놓았다. 이 때 아내가 이런 방식이 너무 수동적인 거 아니냐고 했다. 신세 한탄 대신에 오히려 할 수 있는 것을 찾아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뜨끔했다. 그래서 한계 상황을 인정하고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찾기 시작했다. 드로잉과 작은 작업들은 그렇게 시작됐다.

이: 초기 작업에는 주변 인물과 사물을 단순한 색면을 통해 표현하여 평면성을 추구하려는 작업을 해왔다.

장: 학교 재학 시절에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냥 그림이 좋았다. 그림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왜 그려야 하는지에 대한 판단이 딱히 없었다. 그래서 우선 주변 사람들부터 그렸다. 그리고 작업실에 있는 사물을 그렸다. 당시에는 내가 “굳이 무언가를 발언하기 위해 그림을 그려야 하나, 이것은 자체로 내 언어이다.”라는 생각을 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오히려 작업을 안일하게 했다.

이: 언어를 얘기함에 있어서 ‘내 언어’라고 하면 이미 그것은 언어가 아니다. 언어는 누군가와의 약속이다. 누구와도 약속하지 않은 것은 언어가 아니다. 최근 회화 작업을 보면, 사진을 촬영하고 그것을 ‘재현’하는 작업이 많다. 그 경우 회화를 매체로 하는 것과 사진을 매체로 하는 것은 다르다. 사진은 대상을 찰나적 이미지로 바라본다면, 회화는 대상과 작가가 마주해서 그것을 자신의 몸에 새기는 과정이 아닐까. 그렇다면 붓 터치가 매우 중요한데, 붓 터치는 대상과 나의 대화의 기록이어야 한다. 최근의 작업들을 보면, ‘무엇을’ ‘왜’ 그렸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것은 대상과 내가 어떤 대화를 나누었는지에 대한 의견 교환이다. 작가들의 작품설명을 듣다 보면, 무엇을 그렸다에 중점을 둔다. 결국 주변 사람(사물)의 어떤 것이 그들을 화면으로 이동시켰는지에 대한 숙고의 과정은 생략된다. ‘내 주변’이라는 말 보다는 ‘왜 그들이 내 주변에 있었는지’, ‘그들은 도대체 나에게 어떤 말을 건네는지’에 대해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나의 붓터치와 어떻게 만나는지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장: 작은 그림이 그런 고민에서 시작되었다.

이: 나 역시도 그런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작은 그림은 대상에 대한 대화의 과정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한 방법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예민함의 숙련 없는 큰 그림은 크기의 스펙타클에서 오는 파급력 이외에 사람(사물)의 내밀성을 추출하지는 못한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작업이란, 대상 앞에서 오랜 시간 함께 했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작업이다. 한 순간의 이미지가 아니라. 결국 대상을 많이 그리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대상과 얼마나 고민을 했고, 그 대상이 나에게 무엇을 이야기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장: 개인적으로 회화의 언어를 만들어갈 절대적 시간이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그런 시간이 없었다. 반복적인 작은 붓질을 사용하고, 중첩 효과가 있는 유화를 쓴다. 재료적인 부분에서 변화와 실험을 하기도 했지만, 딱히 회화적 당위는 없었다.

이: 사물의 색 대비를 극대화한 작업은 좋다. 그러나 미세하게 남아 있는 깊이감이 평면적 색의 대비를 파괴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또한 일정 부분에서는 면과 면의 직접적 대비를 보이면서 대상이라는 의미를 포획할 만한 힘을 얻지 못하는 경우도 보인다. 그럼 이제 드로잉 이야기로 넘어가보자.

장: 회화 안에 사람들을 몰입하게 하는 장치들을 두고싶지 않았다. 이런 태도는 드로잉 작업에서도 유지했다. 인위적인 감정을 추출하기보다는 담담하고 무미건조한 태도를 가지려고 노력했다. 타임지나 뉴스위크에서 극적인 보도사진을 골랐다. 그리고 사람들의 표정, 사진의 색감 등 감정을 자극하는 것을 지워나갔다. 그러나 의미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지워지고 남는 부분에서도 충분히 그런 상황을 나타낼 수 있도록 하고 싶었다.

이: 드로잉마다 텍스트가 있는데.

장: 처음에는 중요한 문장 전문을 쓰는 것을 계획했는데, 이후 몇 단어만을 남기고 지웠다.

이: 아무 규칙 없이 지우는 것은 아닐텐데.

장: 사진은 주로 아랍의 민주화 운동과 관련된 것들이다. 텍스트는 원본 이미지와, 지운 이미지의 긴장 상태를 만들어주는 최소한의 내용만 남겼다. 직접적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완전히 배제하지도 않는 상태를 유지하고 싶었다.

이: 어쩌면 텍스트는 일종의 힌트이다. 이 때 너무 많은 힌트를 준다면 그 게임 자체가 싱거워진다. 게임의 흥미를 유발하기 위해서는 알듯 모를 듯 중간 지점을 잘 포착해야 한다. 그러나 몇몇의 그림에서는 이미지가 너무 노골적이거나 텍스트가 지시적이다. 하지만 이미지와 텍스트가 힌트의 긴장 상태로 있는 것이 좋다. 아랍권의 나라와 관련된 민주화 운동을 리서치의 개념으로 진행하면 어떨까? 얼핏 보면 관광객의 시선에서 머무르는 듯 하지만, 그 안에 또 다른 이야기가 충돌한다. 즉 타자에 대한 솔직한 태도가 마음에 든다. 타자를 모두 안다고 생각하는 것도 아니고 내가 아는 정도에서 할 수 있는 것을 모색하는 것 같다. 그들과 우리의 차이를 인정하는 태도, 이것이 중요하다.

장: 드로잉을 하다보니 집이 작업실이 되었다. 집에 있는 모든 것들이 소재다. 그 첫 번째 재료는 ‘기타’이다. 아내가 기타 연습을 하는데 매우 서툴렀다. 그러나 꽤 열심히 하는 모습에서 지금 사회 안에서 작가로서 나의 모습이 중첩되었다. 정말 열심히 하는데, 아직 서툰. 그것이 현재의 내 모습이었다.

이: 이 기타는 계속 가지고 있던 것인가?

장: 초등학생 때 외삼촌이 나에게 주셨다. 이후 계속 가지고 다녔다. 예멘에 있는 동안 부모님이 이사를 했는데, 다른 짐은 많이 버리셨으면서, 심지어 그림도 몇 개 버리셨다. 그런데, 이 기타는 버리지 않으셨다. 이미 망가져서 잘 되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어머니는 내가 기타 치는 것을 좋아하셨고 그 모습에 애착이 있으셨다. 그래서 더 이것을 버리지 못하신 것 같다. 서툴지만 열심히 하는 모습. 그리고 과거에서 현재까지 나와 함께 하는 모습에서 기타는 나의 초상화라고 할 수 있다.

이: 기타 외에도 이번 전시에는 ‘버려질 뻔 한 것들’이 가득하다.

장: 밥상, 화분 등 생활 곳곳에서 사물을 가져왔다. 그리고 거기에 텍스트를 남겼다.

이: 영상 작업도 함께 이야기하자. 처음에는 다른 맥락으로 보였는데, 일상의 어느 순간에 찰나적으로 발견된 영상을 보면서, 이 오브제도 어느 순간 나에게 의미 있는 존재로 왔겠다, 라는 생각을 했다. 결국 ‘작업 거리’를 찾아 그것을 ‘작업’으로 가져간 것이 아니라, 처음 언급했던 것처럼 생활과 작업이 함께 한다.

장: 이번 전시의 오브제는 버려도 아쉬울 것이 없는데 버리지 못하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옥타비오 파스의 시론을 읽었다. 그는 시를 지나치게 신격화 시키지도, 지나치게 사물화 시키지도 않는다. 그는 시어들이 곳곳에 존재하고 그것을 누군가가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드러내어지는 경험과 맞닿는다고 말한다. 내 작업도 그랬으면 좋겠다.

이: 결국 작업이 될만한 것들을 찾기 보다는 내가 내 삶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과정에서 발견되어져야 한다고 본다. 들춰지는 것. 대면하는 순간에 대한 충실. 이 순간을 포착한 것이 ‘~하다가’ 라는 제목의 드로잉인 것 같다.

장: 드로잉을 틈날 때마다 하려고 했는데, 집에 그릴 것이 많지 않다. TV보다가, 옷 갈아 입다가, 순간순간 상황을 보고 그렸다.

이: ‘~하다가’라는 표현이 재미있다. 서툴지만 열심히 하려는 치열한 삶이 있고, 그 삶에서 잠시 벗어나 작업을 하고, 그리고 다시 삶으로 돌아가는 과정이 현재의 모습인 것 같다. 누군가는 정지상태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지만, 다시 이어지는 단계, 그리고 미세하게나마 변화하는 일상. 아마 ‘무용의 예술’이 ‘유용의 예술’로 변하는 지점이 아닐까?

장: 나만 그런지 모르겠지만, 뭔가를 해야한다는 내적 압박이 있다. 아무 것도 하지 않다가도, 그런 때만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 순간을 놓치면 다시 오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알고, 어떤 면에서는 두렵기도 하다. 절실해야겠다는 생각도 한다.

이: 작업, 생계, 이 극단적 모순에 놓인 이들의 관계를 한 사람이 모두 수행하는 데서 오는 고단함 같은 것이 느껴진다. 작업 시간을 가진다는 것이 오히려 사치로 보이기도 하고, 그럼에도 작업을 계속해야 하는. 다소 괴롭게 보이기도 한다.

장: 집안에서 이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한다는 것에서 더 한계를 느낀다.

이: 굳이 집안으로 한정할 필요는 없다. 매 순간들을 눈으로 새기는 것도 중요하다. 추후 어떤 작업을 하게될지 알 수 없지만, 이 자체가 작가로서의 태도가 아닐까? 전체적으로 보면 사실 드로잉이 제일 흥미롭다. 솔직히 다른 설치들은 1차적인 이야기로 다가온다. 몰랐던 무언가를 발견했을 때 기쁜 정도. 그러기에 지금 오브제에 투여한 감정, 감성이라는 것이 얼마나 발전되고 지속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일상과 예술의 긴장감을 유지한 상태에서 발견된 사물이라는 데에서는 의미가 있지만, 이후 작업이 그려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번 전시 이후 드로잉을 통해 현재 전시를 다시 숙고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 두 드로잉에서 보여지는 태도가 이후 작업에 어떻게 변형되고 전개될지 궁금하다.

장: 한계상황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거기서 투덜거림보다는 나아갈 수 있는 길을 모색할 수 있다.

이: ‘지금-여기’에서는 모색이 중요하다.

May 27.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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