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pen, 2011

a pen

group show with Bae. Younme
gallery cafe [the:page], Seoul

어떤 이미지는 우리 기억 속에 얼룩처럼 남아서 그 흔적이 오래도록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얼룩은 그림자도 없고 두께도 없이, 그리고 오래된 것일수록 색도 없이 그 자리에 존재한다.

내 그림들은 이런 얼룩들의 조합이다. 내 눈에 흔적을 남긴 이미지, 그리고 작업실 주변에 널려있어 이미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얼룩이 되어 있는 사물들을 모아 하나의 화면을 구성한다. 일상 속에서 ‘이게 언제 묻었지?’라고 묻는 것처럼, 때로는 예상하지 못했던 것들이 얼룩으로 남기도 한다.
현대의 많은 이미지들은 사람들에게 적극적인 반응을 요구한다. 영화와 드라마, 그리고 텔레비전에서 만나는 장면들은 자극적으로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얼룩이 아닌 스크래치를 남긴다. 때로는 사람들을 공격하기도 한다. 우리의 눈과 뇌는 피로를 느낀다. 하지만 이미 깊은 자국을 남겨 좀처럼 헤어 나오기가 힘들다.

잠깐 화가가 모델을 앞에 앉혀 두고 그림을 그리는 장면을 상상해 보라. 아니 그 화가 자신이 되어서 모델과 주변을 바라보라. 화가에게 얼룩으로 남겨진 대상들을 마주해보고 대화해보라. 바닥에 놓인 페인트 통의 빨강, 세워둔 우산에서 흘러내린 빗물자국, 녹색 바닥과 보색을 이뤄 더 강열해진 달력의 뒷면. 잠시 눈을 감고 있어도 좋다. 그래도 그림은 우리에게 ‘바라보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그림을 통해 기억 속에 남은 얼룩은 단조로운 일상을 조금 더 운치 있는 것으로 만들어준다. 알랭 드 보통의 표현처럼 현실 속에서 ‘호퍼 적’인 것을 느끼는 것이다. 그림을 통해 세상의 빨강이 다 같지 않음을 알게 되고, 우산에서 흘러내린 빗물자국에 모양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달력의 뒷면에도 멋진 색이 있다는 것을 관객이 알게 된다면, 그 그림을 그린 이에게 더 없는 기쁨을 주는 것이다.

화가들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얼룩을 남기고 싶어 한다. 자신의 그림을 본 사람들의 저장소에 그것의 한 부분이라도 남아서 맴돌기를 바란다. 관객들이 그 얼룩을 통해 조금이나마 운치 있는 현실을 살게 해주는 것이 바로 그림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선물이 아닐까.

2011. 5
작가노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