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러보다, 바라보다, 그리고 마주보다, 2007

둘러보다, 바라보다, 그리고 마주보다

solo show
November 26. – December 5. 2007
Korea National University of Arts, seoul 


 

나에게 있어서 작업이란 작가의 영역을 만드는 것이다. 그 영역은 작품 자체의 내용적인 면에서 정치적인 영역일 수도 있고 개인의 자전적인 영역일 수도 있다. 아니면 그 형식적인 면에서 새로운 매체의 개발일 수도 있고, 아니면 표현 자체에서 느껴지는 감수성의 영역일 수도 있다.

나는 풍경, 정물, 인물을 담는다. 이것들은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내 주변에 항상 있어왔던 요소들이다. 그리고 성장하는 과정 중에 이 요소들은 내 안에서 새롭게 인식되고 재구성된다. 여기에서 내 감수성의 영역이 생겨난다.

감수성에는 보는이의 시선이 담겨있다. 그것은 독보적이거나 창조적인 것은 아니다.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과 어느 정도 교집합을 가지고 있는 영역이다. 하지만 또한 완전히 같은 사람은 없다. 그렇기에 감수성의 영역은 논리적으로 구획하고 설명하기에는 부적절한 것이다. 감수성의 영역은 확정되거나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쉬지 않고 움직이고 있다. 수용자에 따라, 시대나 조건에 따라 계속해서 달라진다.

나는 이러한 영역을 통해서 관객과 나의 시선을 나누고 싶다. 나는 ‘나만의’라고 얘기하지 않는다. 그저 ‘나의’ 시선을 나누고 싶을 뿐이다.

1

언제부터인가 작품을 설명해야 하는 상황 앞에서 나는 말문이 막힌다. “이건 뭘 그린거지?” “궁극적으로 말하려고 하는 게 뭐야?”

한동안은 이러한 질문에 대답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기도 했다. 그저 나는 이미지를 만드는 거라고. 하지만 이러한 일들이 반복되면서 나 스스로에게 관객들에 대한 일종의 책임을 묻기 시작했다.

내 스스로가 그 질문에 답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타인에게 그러한 질문을 요구할 수 있는가? 나는 이제 그 질문에 답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완전한 답이 아니라 하더라도, 적어도 실마리를 던져주는 것이 작가의 최소한의 책임이라 생각했다.

2 동물원

“근대적 모습의 동물원은 1752년 오스트리아에서 처음 생겼다. 18세기는 계몽주의가 유럽사회에 만연해 있던 시기이다. 계몽주의에서 가장 대두되는 인간의 특성은 ‘이성’이다. 인간은 이성으로 세상의 모든 것들을 가늠하고 판단하고 분류하려고한다.

이 ‘이성’은 권력의 한 형태로 자리 잡는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야생에서 본능에 충실하며 살아가고 있는 동물들에게도 그 손을 뻗는다. 인간은 동물을 포획하고 가두고 분류하고 관람하고 분석한다.

동물원 안에는 이러한 인간의 폭력적인 시선이 있다. 그것은 만물의 영장이라 스스로 여기는 교만한 인간의 시선이다. 그들은 이성의 권력을 모든 타자에게 휘두른다. 그들의 이성이 인식하는 동물들의 삶이란 어떤 것인가. 「하케의 동물 이야기」라는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코뿔소는 인간들을 향해 “동물원 안에 있는 동물들도 한때는 야생동물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고 외친다.

우리는 왜 야생을 두려워하는가? 왜 모든 것이 분명하길 원하는가? 분명하다고 생각되는 ‘그것’이 착각일 수 있다는 사실을 왜 알지 못하는가? 인간을 겹겹이 둘러싸고 있는 ‘이성’에의 확신과 착각의 허상들을 왜 깨닫지 못하는가?

나의 사진에는 동물이 주인공이다. 하지만 그 주인공은 묻혀있다. 무대처럼 느껴지는 진짜 나무들, 돌들, 꽃들에 묻혀있다. 그리고 여러 도구들 안에 묻혀있다. 그것들은 인간이 동물들을 위해서(?) 만든 가상현실이다. 그곳에는 가상의 자연이 있다. 그리고 그것은 동시에 인간에게도 가상현실을 제공한다.

이제 인간은 야생을 더 이상 순수하게 느끼지 못한다. 그들이 보는 아프리카는 동물원에 있는 세트장의 이미지에 묻혀 더 이상 아프리카가 아니다. 인간은 더 이상 온전한 진실을 보지 못한다. 동물들에게 제공한 가상현실이 인간에게도 동일하게 영향을 미친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 또 하나의 시선이 있다.

가상현실에 갇힌 동물들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이다. 나는 그 가상현실에 몰입되지 않기 위해 동물과, 그리고 동물원과 거리를 둔다. 일정한 거리를 둠으로써 나는 ‘나의 시선’을 유지하고자 한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미 나 역시 한명의 인간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진실은 유리에 비친 나와 사진기의 모습에서 뚜렷하게 드러난다.

‘인간’이라는, 그리고 ‘이성’이라는 족쇄에 묶여버린 인간이 있다. 그리고 동물원 안에서 유유히 살아가는 동물들이 있다. 누구의 모습이 더 비극적인가?” (2006년 가을)

2006년 가을과 2007년 봄, 촬영을 위해 동물원을 수차례 방문하면서 나는 묘한 기분을 느꼈다. 그것은 일종의 ‘부자연스러움’이었다. 그리고 거기서 이루어지는 인간과 동물의 관계는 ‘불편한’ 것이었다.

그런 부자연스럽고 불편한 관계가 ‘동물원’이라는 무대에서 지금도 유유자적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3 road-side dog

-Czeslaw Milosz

I went on a journey in order to acquaint myself with my province, in a two-horse wagon with a lot of fodder and a tin bucket rattling in the back. The bucket was required for the horses to drink from. I traveled through a country of hills and pine groves that gave way to woodlands, where swirls of smoke hovered over the roofs of houses, as if they were on fire, for they were chimneyless cabins; I crossed districts of fields and lakes. It was so interesting to be moving, to give the horses their rein, and wait until, in the next valley, a village slowly appeared, or a park with the white spot of a manor in it. And always we were barked at by a dog, assiduous in its duty. That was the beginning of the century; this is its end. I have been thinking not only of the people who lived there once but also of the generations of dogs accompanying them in their everyday bustle, and one night — I don’t know where it came from — in a pre-dawn sleep, that funny and tender phrase composed itself: a road-side dog.

나는 문학에서 그림의 모티브들을 얻곤 한다. 시나 소설을 보다보면 머릿속에 그려지는 장면이 있다. 그 색깔, 냄새, 분위기, 감수성이 있다. 아마 그 시나 소설을 보는 모든 사람의 머릿속에 저마다 다른 그림들이 그려질 것이다.

외국어로 된 서적들을 잔뜩 쌓아놓고 팔던 벼룩시장에서 헐값에 시집 하나를 샀었다. (당시 현금이 없어 친구가 사준 것으로 기억한다.) 『road-side dog』 이라는 제목의 시집은 흔히 듣지 못했던 어느 나라의 시인이 쓴 것이었다. 같은 제목의 시를 보면서 나는 머릿속으로 수많은 그림들을 그렸고, 그 그림의 대부분은 내가 타지에서 경험한 이미지와 감수성들이 반영된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내 기억 속의 하늘과 땅을 바탕으로 삼고 그 위에 이미지들을 배치했다. 마치 road-side dog 이라는 단어가 분명한 개연성 없이 문뜩 떠오른 것처럼 내가 찍은 사진 속의 요소들을 색면 위에 특별한 개연성 없이 배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이야기들이 만들어지는 것을 본다.

내 그림을 본 몇몇 사람들은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는 것 같다고 한다. 하지만 동시에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고 한다. 둘 다 맞는 말이다. 그림 속의 사람들은 진행중인 이야기 속에 담겨져 있다. 하지만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4

한동안 그림을 그리는 데 있어서 사진을 많이 의존했다. 어느 순간부터 직접 보고 그리는 것에 대한 간절한 필요를 느꼈다.

나는 예전부터 인물을 그리는 데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나는 물론 내가 그린 그림들에 애착이 있지만, 절대 스스로 그림을 잘 그린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대상을 직접 보고 그리는 것은 그리 편한 것은 아니다. 대상과 계속 소통해야 하고, 또 그의 상태를 그저 무시할 수 없다.

인물을 그려야겠다는 강한 마음에 이끌려 모델을 구하게 되었고 꽤 오랫동안 작업을 진행했다. 가능하면 사진에 의존하는 것을 피하고 직접 인물을 대면하고 작업하려 애썼다. 한 학기동안 진행시킨 인물화는 그동안 내가 해왔던 작업과는 조금 다른 면을 나 스스로에게 보여주고 관심갖게 했다.

사람마다 그 자신만의 톤(tone)을 갖고 있다. 그것은 그가 즐겨 입는 옷에서 나오는 것일 수도 있고, 목소리에서 또는 피부색에서 나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떤 사람의 톤은 나로 하여금 그림으로 표현하고 싶어지게 만든다.

 

사람은 자신이 우선순위를 두는 정체성이 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은 예술가라는 정체성보다 한 가족의 구성원이라는 것을 우선에 두는가 하면, 그 반대인 사람도 있다. 이러한 우선순위는 그 사람의 전반적인 행동이나 생각, 심지어 마음의 상태까지도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그 사람으로부터 파생되는 결과물들에 그 영향은 드러난다.

나에게 있어서 가장 우선순위가 되는 것은, 미술을 하는 사람이기 이전에 한 가족의 구성원이며, 또한 그 이전에 한 명의 인간이며, 그보다 앞서서 신 앞에 서 있는 피조물이다.

내 생활의 영역이든 신앙이나 신념, 가치관, 작업의 영역에서 결국 회기하는 지점은 ‘관계’이다. 신과의 관계, 사람들과, 내가 속한 사회와 세상과의 관계. 나는 그 속에서 끊임없이 둘러보고, 바라보고, 마주본다. 그리고 거기서 생겨나는 시선을 작업물들로 드러내고 관객들에게 둘러보고, 바라보고, 마주보게 한다.

와의 나의 만남은 은혜로 이루어진다 찾아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내가 를 향해 저 근원어를 말하는 것은 나의 존재를 기울인 행위요, 나의 본질 행위이다.

는 나와 만난다. 그러나 와의 직접적인 관계에 들어서는 것은 나다. 그러므로 관계란 택함을 받는 것인 동시에 택하는 것이며, 피동인 동시에 능동이다. 그것은 마치 온 존재를 기울인 능동적 행위에 있어서는 모든 부분적인 행위가 정지되고, 그리하여 모든 한갓 부분적인 행위의 한계에 근거를 둔행위감각이 정지되기 때문에 그 행위의 능동성이 수동과 비슷하게 될 수밖에 없는 것과 같다.

근원어 는 오직 온 존재를 기울여서만 말해질 수 있다. 온 존재에로 모아지고 녹아지는 것은 결코 나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나 없이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 ‘는 너로 인하여 가 된다. ‘가 되면서 라고 말한다.

모든 참된 삶은 만남이다– 마르틴 부버 『나와 너』